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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삶과 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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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말하는 능력

인생은 다양한 부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물 또한 하나의 결과가 아닌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삶을 이야기 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삶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부분들을 한번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난 글에서 창의성이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창의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전에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에 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인지하다, 보다.’는 것의 뜻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이 운동장에서 축구공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 사람 바보 아니야? 당연한 걸 뭘 놀라고있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둥근 물체가 어딘가로 굴러가는 이동을 지식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공이 굴러가는 것 자체를 신기해하며, 반복해서 보더라도 즐겁게 보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어른들은 공이 단순히 구르기만 하는 것을 보라고 한다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거나 한 번이면 족하다 답할 수 있습니다. 어른은 지적 경험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이들은 일차원적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겪는 일도 사물을 볼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관찰하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볼까요? 그 사람의 국적, 인종, 패션, 직업, 사는 곳 등. 사람을 동물의 과와 목을 분류하듯 분류할 따름입니다. 사람을 관찰 할 때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의 구체성이지,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면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추상 그 이상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구체적 면모를 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자기 투영과 왜곡 없이 본다는 의미이며, 내면과 외부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의적 삶의 조건

보고(인식, 인지) 대답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에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감탄하는 능력’입니다. 프랑스 수학자 레몽 푸앵카레는 ‘과학의 천재성이란 놀라는 능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보고 느끼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입니다. 하루에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현대인은 특히 핸드폰 때문이라도 집중하는 시간이 매우 짧을 것이라는 예상이 됩니다. 식사 자리에서도, 어딘가로 이동하면서도, 심지어 상대방이 앞에 앉아있는 그 순간에도 핸드폰을 보고 있습니다. 집중한다는 건 그 대상에게 집중하는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자기를 경험하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한 종교인이 태어날 때부터 믿어온 종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종교인의 믿음은 그저 부모와 종교로부터 주입되어 그저 보고 들은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지만, 이런 행동을 보고 에리히 프롬은 ‘그것이 내 안에서 생각한다는 표현이 더 옳다’고 표현합니다. 주위를 관찰해보면 종종 실제로 즐겁다거나, 행복하다거나, 기분이 좋다고 믿는 것과 자신의 감정이 완전히 다른 것을 내비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 외부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경험합니다. 창의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자기’에게 근원을 두는 경험입니다.

 

자기에게 근원은 둔다는 것은 자기 정체감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 독립적인 생명체로 ‘자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봤을 때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라거나 자기도취적, 나르시시즘인 것을 추구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자기 인지와 정체감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온전한 ‘자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경험하는 것을 자칫 자신을 소유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지식, 몸, 기억 등과 같은 것을 자기 경험이자 자신이라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의적 경험이 아니라 ‘나’를 사물로 인식하는 행위이며 그 사물을 소유함으로 그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자신에게 구속된 포로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행위를 벗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을 벗어날 용기

또 다른 조건은 매일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다짐입니다. 당연히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안전한 상태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새로운 상태를 향해 발전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양면성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뇌하며 살아갑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곳을 향한 걸음은 용기가 필요 합니다. 안전을 뒤로할 용기, 타인과 다름을 아는 용기, 고립을 견딜 용기가 그런 것들입니다. 무심코 보다 보면 창의적인 삶의 조건은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도 계속 언급했던 믿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을 갖춘 또는 어떤 예술가만이 닿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하고 분명 그렇게 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이 창의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리해 봤습니다. 지금 글을 쓰면서 ‘내가 창의적 조건을 갖춘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자문자답해 봅니다.

 

다음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이 생각하는 죽음에 관해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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