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리학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

반응형

자유의 정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런 국가체제를 갖춘 만큼 우리에게 자유란 공기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없으면 이상한, 혹은 불편한 것입니다. 숨 쉬듯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정작 ‘자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자유란 무엇입니다.’라고 정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합니다.

 자유
  1. 명사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3.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

뜻은 저렇게 정해두었지만 결국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자유란 더 다양하게 해석되기 마련입니다. 이토록 각자의 뜻이 있겠지만, 제목에 써둔 것처럼 이 글에서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가 한 가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근대 사회에서의 자유는 “자신을 독립된 별개의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용

인간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 분리되는 것처럼 인간은 개인화, 개별화, 개체화를 통해 별개의 생물학적 존재가 됩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 점차 뚜렷하게 존재하게 되면서 동시에 외로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정신적 안정을 찾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좋은 것일까?

⁠ 독립적, 비판적, 자립적 모습을 갖춘 인간이라 하면 멋없게 느끼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립, 고독, 외로움이라고 하면 꽤 인간적인 모습을 잃은 듯합니다. 이처럼 자유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어떤 부분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인간은 항상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찾아보는 확증 편향적 특성이 있는데 보통은 현대인들은 고통을 피하고 피상적 행복과 즐거움만을 좇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이 자유의 좋은 면모만 인식하고 있을 것이며, 또 여러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써보아도 자유의 비판적인 면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 이전에 억압된 혹은 전통적 규제와 싸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는 단순히 싸움에서 승리해 전통적인 것이 무너지기만 해도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과 규제의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은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자유를 방해하는 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몰랐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데 매혹되어, 자유가 전통적인 적들한테 거둔 승리의 의미를 ‘내부’의 제약과 충동과 두려움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내부’의 제약과 충동은 무엇일까요? 우울증, 사회동조 강박, 개인적 무력감 등등을 뜻합니다. 예전 철학자들은 이미 개인의 무기력함을 예견해 왔습니다. 벌어질 수밖에 없던 일일까요?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어깨에 큰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무거운 짐은 계속 짊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쟁취한 자유는 항상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이러한 소극적 자유에서 진정한 자유,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전통적 규칙에서 벗어난 수동적, 소극적 자유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극적 자유를 가진 사람들

 인간은 행동에 동기가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동기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는다면, 보다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소극적 자유의 대표적 유형으로는 권위주의에 기댄 자유, 다시 말해 고독으로부터의 도피, 피학적, 가학적 충동을 띤 도피성 자유입니다. 피학적 대상은 타인이나 제도 등 자신을 외부에 의존함을 통해 그 힘으로부터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가학적 대상은 타인, 환경 등을 제어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유형입니다. 이 두 유형은 도피를 통한 자유를 떠올렸을 때 예일 수 있는 대표적 유형이다. 다른 유형으로는 모호함에 의존하는 유형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갖춰야 할 책임감을 타인에게도 지워 개인이 감당할 문제를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가지는데, 전가할 대상을 신, 원리, 부모, 배우자, 상사 등 실제 인물로 여기기도 합니다. 자칫 이들의 태도는 ‘사랑’이라고 보이기도 하는데, 그들의 무의식은 사랑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 기대했던 무엇인가를 그들에게서 얻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기본적으로 도피적 자유를 바라는 인간의 공통점은 참을 수 없는 개인의 무력감과 외로움을 뿌리로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감정은 자연스럽게도 외부로 폭력성을 띠게 하고 그것이 곧 파괴로 이어집니다. 파괴는 곧 안정을 불러옵니다. 여기서 파괴의 대상은 자신이 외부로부터 갖는 두려움의 대상을 모두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명체, 상황, 환경, 감정 등 어떤 것이든 대상화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도피의 상태는 외부가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물러서는 방법과 자신을 심리적으로 확대해서 외부 세계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유별난 메커니즘은 근대 사회에서 정상인 대다수가 발견하는 해결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용-


에리히 프롬은 이런 모습을 두고 보호색과 같다고 말합니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노동인구가 얼마일까요? 그중 얼마의 사람들이 자신의 개별성을 갖고 일할까요? 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다룬 그의 생각을 다루어 보려 합니다.

 

 

반응형